1969년 설립된 전주 제일활자의 납활자들과 45년 역사의 대구 봉진인쇄에서 가져온 70년대 국산 활판인쇄기. 열여섯 살 때부터 납활자를 주조(鑄造)한 정흥택(75)씨와 40년 활판 인쇄 경력의 김진수(61)씨. 고색창연한 설비들과 올드 보이들이 뭉쳤다. 활판 인쇄의 귀환을 위해서다. 지난달 29일 파주출판도시 안에 문 연 활판인쇄박물관 얘기다.
소설가 방현석씨 파주에 문열어
관람자가 직접 제작·인쇄해 볼 수도
인쇄 공정이 컴퓨터화하면서 빠르게 사라졌지만 책 한 권에 들어가는 납활자를 일일히 뽑은 다음(문선) 문장을 만들어(식자) 제작하는 활판인쇄는 내구성 강한 출판 방식으로 알려졌다. 질 좋은 한지(韓紙)에 활자를 눌러 인쇄하다 보니 잉크가 쉽게 지워지지 않아 100년 이상 간다는 것. 하지만 시간·노동력을 잡아먹다 보니 극소수의 출판사나 전시관만 상징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파주출판도시 활판인쇄박물관 안에 전시돼 있는 납활자들. ‘가나다’ 순으로 진열했다. [사진 아시아]
파주 활판인쇄박물관 설립을 주도한 소설가 방현석(55)씨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문화가 있다고 자랑하지만 정작 다른 나라에는 남아 있는 활판인쇄가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사라진 현실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기자간담회 자리에서다. 방씨는 “속도와의 경쟁을 거부하는 인쇄 방식이다. 후딱후딱 책 만들어 한 달 정도 서점에 깔려 있다 팔리지 않으면 반품·폐기되는 책이 아닌 오래 소장하고 싶은 책을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방씨는 특히 활판인쇄박물관이 체험과 출판을 겸하는 기관이라고 강조했다. 향수 어린 과거에 대한 단순 전시공간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를 위해 박물관 측은 무게가 17t에 이르는 3267만 개의 납활자를 전국에 수소문해 수집했다. 앞으로 모자라면 영입한 주조공 정흥택씨가 활자를 만든다. 알비온·반터쿡 등 유명 인쇄기는 물론 접지기·압축기·사철기 등 도서 제작에 필요한 설비들을 두루 갖췄다. 조선시대 종이 제작 국가기관에서 이름을 딴 ‘조지소’를 박물관 안에 둬 한지를 직접 제작해 볼 수도 있다.
별도 공간인 활판인쇄학교와 박물관에서 인쇄 체험, 글쓰기 학교 등 각각 5000원에서 2만5000원까지 참가비를 받는 14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고은 시선집 등 다섯 종의 책 표지를 직접 문선해 인쇄까지 해볼 수 있다.
박물관은 첫 책도 출간했다. 안선재 서강대 명예교수가 번역한 영한대역 한국 대표시 선집 『시를 새기다(Korean Poems Printed by Letterpress)』이다. 300부만 찍어 가격이 3만원이다. 031-955-9151.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